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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하디의 <퓨처셀프> 속 마르코스와 코라손의 이야기

<벤저민 하디>의 저서 <퓨처셀프>를 읽다가 흥미로운 주제가 나와서 옮겨 본다.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과 코라손 아키노에 관한 내용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Ferdinand Marcos는 타고난 거짓말쟁이었다.

1965년 12월 30일, 그는 자신이 "필리핀 역사상 최고의 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임을 주장하면서, 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이 됐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필리핀 전역에 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정책을 공격적으로 단행했다. 외국 자본을 빌려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고 학교와 복합 시설을 지었다. 대통령 첫 임기 동안, 그는 파격적인 재정지출을 감행하며 인기를 얻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Ferdinand Marcos


마르코스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동안 이 재정지출이 쌓여 국가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인플레이션 위기가 닥쳤다. 필리핀의 경기  급격하게 침체했고,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불안 요소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마르코스는 국민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 그와 그의 가족은 필리핀 중앙은행에서 도둑질한 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마르코스 가족은 50억에서 100억 달러로 추정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정부 절도로, 기네스북 세계기록에도 등재됐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자신의 군대에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했는데, 이는 외국 침략 세력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철권통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을 통제하고 처벌하기 위해서였다.

마르코스가 집권하는 동안 필리핀은 빚의 수렁으로 깊이 빠졌다. 사회적, 도덕적으로 부패가 만연하면서 나라에 내부 분열이 생기고 갈등이 폭발했다.

많은 사람이 정권 교체를 원했다. 그 가운데는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2세 Benigno Ninoy Aquino Jr.라는 젊은 신진 정치인이 있었다.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난 니노이는 1954년, 22세에 불과한 나이에 시 장에 당선됐다. 5년 후인 27세에는 필리핀 정부의 최연소 부지사가 됐다.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2세 Benigno Ninoy Aquino Jr.


니노이는 1954년에 코리Cory라 불리는 코라손 스물롱 코후앙코 Corazon Sumulong Cojuangco와 결혼했다. 코리는 부유한 필리핀 가톨 릭 집안 출신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니노이가 정치 경력을 쌓아가는 동안, 코리는 자녀 다섯을 양육하는 데 전념하며 남편의 정치 활동을 도왔다. 코리는 남편이 무언가 결정을 내릴 때 매우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니노이는 1965년에 상원의원으로 당선됐고, 그해에 마르코스를 부패 혐의로 기소했다. 군대 예산을 늘려 군국주의 국가를 설립 하려 한다는 혐의도 추가했다. 그리고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멜다 Imelda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사기 행각을 용기있게 비난했다.

니노이의 추종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니노이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를 이길 유력한 후보가 됐다. 니노이의 대의명분에는 힘이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 자유, 도덕규범, 훌륭한 지도력, 국민 통합, 풍요로운 필리핀을 꿈꿨다.

1971년 8월 21일, 자유당의 전당대회가 열렸다. 군중의 환호성과 밴드의 신나는 연주가 뒤섞였다. 그런데 갑자기 폭탄 두 개가 터졌다. 폭탄 테러로 8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 자유당 후보였던 니노이는 없었다. 그래서 마르코스는 니노이가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려고 자작극을 벌인 거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 때문에 그다음 해에 정치적·사회적 소요가 잇달아 일어났다. 마르코스는 혼란이 가중된 틈을 타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 1935년 제정된 헌법에 따르면, 마르코스가 대통령을 세번 연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르코스는 1972년 9월 21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기존 헌법을 폐지하고, 자신이 장기 집권할 토대를 마련했다.

계엄령에 따라 마르코스는 즉각 니노이를 체포해 사형을 선고했다. 니노이는 재판을 기다리며 감옥에서 8년을 보냈다. 코리는 고립된 상태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홀로 키웠다.

감옥에 갇힌지 거의 6년이 흘렀는데도 조국 민주주의를 향한 니노이의 집념은 약해지지 않았다. 니노이는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고, 1978년에는 수감된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1980년 3월 중순, 감옥에 있던 니노이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필리핀 심장 센터로 이송됐다. 병원에서 그는 또다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심전도 검사 결과 동맥이 막혀 있었지만, 필리핀 의사들은 관상동맥우회술을 하기를 꺼렸다. 니노이를 살려놨다고 마르코스에게 보복당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노이는마르코스가 의사를 매수해 자신을 해칠까 봐 필리핀 의사에게 치료받는 걸 거부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가 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니노이의 요청은 조건부로 받아들요졌다. 해외에 있는 동안 마르코스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치료가 끝나는 즉시 귀국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니노이는 빠르게 회복했고, "악마와의 약속은 약속이 아니다."라며 마르코스가 내건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 1980-1983년까지 3년 동안, 니노이와 코리는 자녀들을 데리고 보스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니노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두 권의 책을 썼고, 강연을 다녔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주는 연구 장학금을 받으며 생계를 이어갔다.

1983년 초 니노이는 필리핀의 정치적 상황이 갈수록 불안해지며 마르코스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귀국할 시기가 임박했다고 느꼈다. 필리핀으로 돌아가 마르코스에게 극단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조국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니노이는 필리핀으로 돌아가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은 "사람이 목숨을 걸 일을 찾지 못하면 살 자격이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필리핀 정부는 국제 항공사들에 니노이를 필리핀행 비행기에 탑승시키면 착륙 허가를 하지 않고, 강제로 회항시키겠다고 경고했다. 필리핀 입국을 금지당한 니노이는 마르코스를 반대하는 분리주의 단체에서 위조 여권을 받았다. 입국 심사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며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탄 끝에, 니노이는 1983년 8월 21일, 필리핀에 착륙했다.

자신의 운명을 감지한 그는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다. 니노이는 자신과 동행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이 순식간에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 카메라로 바로 촬영할 준비 를 해두십시오, 3~4분 만에 모든 게 끝날 수 있어요. (웃으면서) 그러면 나는 여러분에게 다시는 말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비행기가 마닐라 국제공항에 착륙한 후, 니노이는 활주로로 이어진 계단으로 나오자마자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다. 니노이를 암살한 사건이 마르코스 정부에 대한 불신에 불을 지피며, 정권을 반대하는 시위가 급증했다.

니노이가 사망한 후 10일이 지난 1983년 8월 31일, 그의 장례미사가 케손시티의 산타 메사 헤이츠에 있는 산토 도밍고 교회에서 거행됐다. 니노이의 어머니 오로라Aurora는 장례식장 측에 "정부가 내 아들에게 한 짓"을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아들의 시신을 그대로 두라고 말했다. 시민 200만 명 이상이 거리에 줄지어 서서 장례 행렬을 지켜봤다.

재판부는 코리의 남편을 암살한 사건에 가담한 피고 26명 모두 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암살 사건을 덮어버리는 필리핀 정부의 만행에 세상의 이목이 쏠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포리는 중대 결심을 했다. 역사가 윌 듀런트는 "상황이 요구한다면 보통 사람의 능력은 두 배로 증가할 수 있다. "라고 말했다.

코리는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리고 필리핀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온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전업주부라고 말한 코리는 반마르코스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부상했다.

198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신에 대한 반대 세력이 늘어나는 것을 알게 된 마르코스는 갑자기 선거를 예정보다 일찍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코리가 대선에 출마해야 한다는 청원도 빠르게 늘어났다. 청원에 서명한 수백만 명에 대한 답변으로 코리는 1985년 12월 3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코라손 스물롱 코후앙코 Corazon Sumulong Cojuangco


선거 운동에 뛰어든 마르코스는 코리가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평범한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악랄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코리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나는 대중을 속이고, 국민에게 사기 치고, 정부의 돈을 훔치고, 정적을 살해한 경험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종류의 정치적 경험이 없다는 건 인정합니다.

1986년 2월 7일에 치러진 선거는 마르코스에게 유리하게 조작됐다. 2월 15일, 마르코스는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며 코리의 지지자들을 폭력과 협박으로 위협했다.

코리는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평화적인 시민불복종 시위를 했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 지도자들이 코리를 지지했다.

2월 22일에는 필리핀 장성 여러 명이 코리를 지지하는 선언을 하며 마르코스 정권에 대항했다. 그들은 필리핀 국군 본부에서 작전을 세웠다. 수백만 명의 필리핀 사람이 힘을 모아 반군 세력을 지원했으며, 코리는 정권 인수 준비를 위해 마닐라로 갔다.

"피플 파워 혁명"으로 불리는 대규모 평화시위가 사흘간 이어지 다음, 코리는 1986년 2월 25일, 필리핀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코리는 아시아 최초 여성 대통령이 됐다.

같은 날 마르코스와 그의 아내는 필리핀을 떠나 괌을 경유해 하와이로 달아났다. 그들은 해외로 도피하며, 다음과 같은 엄청난 자산을 빼돌렸다.

• 7억 1700만 달러(9392억 7000만 원)에 달하는 현금 상자 22개
• 다양한 고급 보석이 담긴 상자 300개
• 팸퍼스 기저귀 상자들에 급하게 담은 400만 달러(52억 4000만원) 가치의 미가공 보석
• 세이코 및 까르띠에 시계 65점
• 진주를 가득 담은 가로 약 4미터, 세로 약 1미터의 상자
•  다이아몬드와 다양한 보석들로 장식된 약 1미터 높이의 순금 조각상
• 20만 달러 가치의 금괴와 약 100만 달러의 페소
• 미국과 스위스, 케이맨제도 은행에 은닉해둔 1억 2400만 달러 (1624억 4000만 원)에 달하는 예금 전표

하와이에서 3년간 도피 생활을 한 마르코스는 72세 생일을 맞은 지 17일 만에 신장, 심장 및 폐 질환으로 사망했다.

하와이에서 머무는 동안 마르코스와 이멜다는 호놀룰루의 마키 키하이츠에 있는 호화 저택에 살았다. 필리핀에서는 자신들이 집권하면서 쌓아놓은 나랏빚으로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데도 마르코스 가족은 사치스러운 파티를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마르코스와 이멜다



코리 아키노는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1986~1992년에, 1987년 헌법 개정을 감독해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고, 상하 양원제 의회를 부활시켜, 과거의 독재적인 정부 구조를 성공적으로 제거했다. 그리고 인기 없는 정책이긴 했지만, 외국의 신뢰를 회복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마르코스가 진 빚 상당액을 상환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코리는 조용히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 갔다. 2009년 8월 1일, 코리는 숨을 거두었고 그를 기리기 위한 기념물들이 필리핀 전역에 지정됐다. 필리핀에서 "민주주의의 어머니"였던 코리 아키노는 자신이 꿈꿨던 미래의 내가 됐다. 코리는 목적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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