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요한의 묵시록(그리스어: ἀποκάλυψις ἀπο, 라틴어: Apocalypsis Beati Joannes Apostoli, 영어: Book of Revelation, 개신교: 요한계시록(―啓示錄), 가톨릭: 요한묵시록(―默示錄)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유일한 예언서입니다. 계시록으로 줄여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계시록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책 서두에 소개하고 있는 요한입니다
요한 복음과 요한 서신들을 기록한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을 가리킬 수도 있고, 유대인 그리스도인 예언자로서 순회하며 초대 교회에서 가르쳤던 다른 요한일 수도 있는데요 어느 요한이든 그는 서두에서 이 책의 저자를 요한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먼저 그는 이 책을 계시 또는 묵시라고 부릅니다.
묵시란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Apocalypsis)'로써 히브리 성경 및 다른 유명한 유대 문헌들을 통해 당시 요한의 독자들에게 친숙했던 문학의 한 종류입니다. 묵시는 예언자의 상징적인 꿈과 환상들을 서술해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드러냄으로써 현재를 역사의 결말에 비추어 볼 수 있게 합니다.
요한은 이 묵시를 예언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위기 상황에서 그분의 백성에게 경고나 위로를 주시기 위해 예언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으로, 이 책을 예언이라고 부름으로써 요한은 이 책이 성경의 전통적인 예언서의 대열에 있으며 구약의 예언들이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묵시적 예언은 요한이 알던 실존 인물들에게 보낸 것으로서 고대 로마의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낸 회람 서신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곱은 요한에게 의미 있는 숫자입니다. 구약에서 7은 7일 주기의 안식일에 근거한 완전함을 상징하는데 요한은 7이라는 숫자를 책의 구석구석에 배치해 놓습니다.
그는 머리말에서 우리가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에 대해 명확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유대 묵시 문학은 상징적인 이미지와 숫자를 사용하는 문학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인지 예측하는 암호가 아니라 오히려 요한은 구약에서 인용한 이 상징들을 계속해서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이 그가 암시하는 구절들을 찾아보고 상징의 의미를 발견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이 서신이라는 사실은 요한이 1세기 교회들의 실제 상황을 다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책이 후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내용이 많다고 해도 책의 의미는 우선 요한이 살던 시대와 장소, 그리고 독자의 역사적 맥락에 입각해야 합니다.
1후-3 | 일곱 교회에 하시는 말씀
이 책의 첫 단락은 예수님이 일곱 교회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지금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상의 왕으로 높임 받으시는 환상을 봅니다. 그분은 일곱 개의 타는 촛불 가운데 계시는데 요한은 이것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상징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는 스가랴서에서 인용한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각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
교회 | 칭찬 | 비판 | 교훈 | 약속 |
예베소 (2:1-7) |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견디고 인내함 | 처음 사랑을 버림 | 처음 행위를 가져라 | 생명 나무의 과실 |
서머나 (2:8-11( |
환난과 궁핍을 은혜롭게 견뎌냄 | 없음 | 죽도록 충성하라 | 생명의 면류관 |
버가모 (2:12-17) |
믿음을 잃지 않음 | 부도덕, 우상 숭배, 음행 | 회개하라 |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을 새긴 돌 |
두아디라 (2:18-29) |
사랑, 섬김, 믿음, 인내가 넘침 | 우상 숭배의 제단과 부도덕함 허용 | 심판이 가까이 온다 믿음을 지켜라 |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 |
사데 (3:1-6) |
믿음을 지킴 | 죽은 교회 | 회개하라 남은 것을 굳게 하라 | 명예를 얻고, 흰 옷을 입을 것 |
빌라델비아 (3:7-13) |
믿음 안에서 인내 | 없음 | 믿음을 지켜라 |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 새 이름, 새 예루살렘 |
라오디게아 (3:14-22) |
없음 | 무관심 |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예수의 보좌에 함께함 |
어떤 교회들은 부와 풍요로 인해 무관심해졌고 어떤 교회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방 신의 제사 음식을 먹고 신전의 창기들과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께 신실한 교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심한 박해도 겪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 교회들은 환난이 닥칠 때 타협과 믿음 중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살던 때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네로 황제의 학살이 지나가고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가 진행 중이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건 단순히 로마 시대의 흐름에 동조하기 위해서건 예수님을 부인하고픈 유혹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충성함으로써 유혹을 극복하라고, 또는 이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기는 모든 사람에게 상급을 주겠다고 교회들에 약속하시는데 각각의 상급은 이 책의 마지막 환상인 하늘과 땅의 혼인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첫 단락에서 는 책의 줄거리를 끌어갈 주된 갈등 구조가 설정됩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이 견뎌낼까요.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창조 세계를 상속받을까요. 왜 예수님께 충성하는 자들이 이기는 자로 묘사될까요. 책의 나머지 부분이 바로 요한의 대답입니다.
4-5 | 하나님의 보좌
다음으로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봅니다. 그러고 나서 구약의 여러 예언서를 인용해 그 모습을 묘사합니다.
모든 피조물과 세상 나라들을 의미하는 생물들과 장로들이 하나님을 둘러싸고 유일하신 참된 창조주,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가 있는데 이는 구약 선지자들의 말씀과 다니엘이 본 봉인된 두루마리의 환상들을 상징하며 모두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 임할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두루마리를 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누가 열수 있는지 듣게 됩니다. 그분은 바로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이십니다. 이는 군사적 정복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실 메시아 왕에 대한 구약의 전형적인 묘사인데요.
그게 바로 요한이 들은 것이라면 그가 눈을 돌려 본 것은 공격적인 사자왕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서 피 흘리는 희생양이 두루마리를 열 준비를 하고 서있는 모습입니다. 이때 예수님을 죽임 당한 어린양으로 상징한 것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요한은 구약에 약속된 장차 올 승리의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메시아를 통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참된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그분의 원수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심으로써 그들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부활로 인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패배가 아닌 왕위 즉위식이 되었습니다.
그게 그분이 악을 이기신 방법이었죠. 그래서 이 환상은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분 곁에서 유일하신 참된 창조주요 구세주로서 그분과 함께 찬양받으시면서 끝이 납니다.
이제 죽임 당한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완성해 가시는 그분의 신적 권위를 상징하지요. 다음 단락은 세 가지 일곱 상징입니다.
일곱 봉인, 일곱 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 이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을 묘사하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세 가지 일곱 심판이 문자 그대로 순차적인 사건들로써 과거에 일어났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요한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배치했는지 살펴보세요. 마지막 일곱 대접은 일곱째 나팔과 일곱째 봉인에서 나오고 일곱 나팔은 일곱째 봉인에서 나옵니다.
마치 러시아의 인형처럼 각 일곱째 안에 다음 일곱이 들어 있죠. 또 각각의 일곱이 최후 심판에서 어떻게 끝이 나며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주목해야 합니다.
6-8전 | 일곱 봉인
따라서 요한이 세 가지 일곱 상징을 사용해서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같은 기간을 세 개의 다른 관점으로 묘사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죽임 당한 어린양이 첫 네 개의 봉인을 떼시고 요한이 네 명의 기수를 봅니다. 이는 스가랴서 1장에서 본 장면이며 각각 전쟁, 정복, 기근 그리고 죽음을 상징합니다. 비극적 이게도 인류 역사에서 평범한 사건들 말이죠.
다섯째 봉인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죽임 당한 순교자들과 그들의 무고한 피의 절규가 재단에 피어오르는 향처럼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죽임을 당할 그리스도인의 수가 차기까지 더 쉬어야 한다고 하시는데요.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영원히 지속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섯째 봉인은 그들의 절규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대답입니다. 이사야서와 요엘서에 기록된 여호와의 날이 임하고 땅 위에 사람들은 누가 견딜 수 있겠느냐고 소리칩니다.
여기서 갑자기 요한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 이야기를 멈춥니다. 요한은 이 모든 환난을 견디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오는 천사를 봅니다. 그리고 인치심을 받은 자의 수가 144,000이라는 것을 듣습니다. 이것은 민수기 1장에 나오는 인구 조사 같은 것으로서 이스라엘 자손의 12지파에서 각 12,000명씩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군대의 숫자가 요한이 들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가 승리하신 유다의 사자에 대해 들은 것처럼요.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그가 눈을 돌려 본 것은 그런 군사적 상징들이 죽임 당한 어린양, 즉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는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 군대가 모든 민족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성취된 것이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이 어린양의 군대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이기라고 명하십니다. 원수를 죽이는 게 아니라 어린양과 같이 고난 받고 증인이 됨으로써 말이죠.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일곱째 봉인이 떼어지는데 두루마리가 열리기 전에 경고의 일곱 나팔이 등장하고 제단 향로에서 불이 담겨옵니다. 순교자들의 외침을 상징하는 이 불이 땅에 쏟아지고 여호와의 날이 완성됩니다.
8 후-11 | 일곱 나팔
요한은 일곱 나팔을 통해 다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번엔 출애굽 이야기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처음 다섯 개 나팔을 불자 출애굽의 재앙이 재연되고 여섯째 나팔을 불자 처음 네 개의 인에서 본 네 명의 기수가 풀려납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모든 재앙에도 불구하고 나라들이 회개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마치 출애굽기의 바로처럼요.
하나님의 심판만으로는 사람들을 그분 앞에 겸손히 회개하도록 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다시 한번 이야기를 잠시 멈춥니다.
한 천사가 어린양이 봉인을 떼신 두루마리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요한은 마치 에스겔처럼 그 두루마리를 먹고 그 메시지를 열방에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마침내 어린양의 두루마리가 열리고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 땅에 임하는지 보게 됩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은 두 개의 상징적인 환상으로 펼쳐집니다. 먼저 요한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 곁의 순교자들을 보는데 이를 측량하고 구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보호를 의미하는 이 이미지는 스가랴 2장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도성의 바깥 들은 내버려져 이방 민족들에게 짓밟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과거에 일어났거나 미래에 일어날 실제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보다는 요한이 예수님과 다른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 새 성전을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의 상징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 이미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나라들로부터 당할 고난에 대한 것이지만 겉으로는 패배한 것 같아도 어린양을 통한 그들의 승리는 빼앗길 수 없습니다.
이는 두 번째 환상에서 더 자세히 부연됩니다. 하나님이 열방에 예언할 대표로 두 중인을 세우십니다. 이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미래의 실제로 나타날 예언자들로 봅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들을 두 촛대라고 부릅니다. 교회를 가리키는 그의 상징 중 하나죠. 따라서 이 환상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예언자적 역할에 대한 것으로서 모세와 이사야를 이어받아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과 권세자들에게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끔찍한 짐승이 등장합니다. 다니엘서 7장에서 본 것처럼요. 그리고 두 증인과 싸워서 이기고 그들을 죽여 버립니다. 그러나 그 후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살리시고 박해자들 앞에서 그들을 높이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나라들이 회개하며 여호와의 날에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일곱 봉인과 일곱 나팔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는 열방에 회개를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마치 출애굽의 재앙이 바로의 마음을 더 완악하게 한 것처럼요. 하지만 어린양은 그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어린양의 두루마리는 그분의 군대인 교회의 사명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열방이 교회가 어린양이 사랑이심을 본받는 것을 볼 때 드러날 것입니다 원수를 죽이지 않고 대신 죽음으로써 말이죠.
열방의 회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주장이 바로 요한이 책의 정중앙에 배치한 열린 두루마리의 메시지입니다. 이후에 마지막 나팔이 울리고 열방은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 임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 떱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열방에 증인이 되어 새 창조 세계를 상속받게 될지 알 수 있습니다.
12-14 | 일곱 표징 (상징)
일곱 나팔 이후 요한은 일곱 상징들을 잠시 멈추고 그가 표징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환상을 소개합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상징을 의미하며 이 단락은 그러한 표징으로 가득합니다. 이 환상들은 열린 두루마리에 담긴 메시지를 더욱 깊이 살펴볼 수 있게 해 주는데요. 첫째 환상은 로마의 박해 아래 고난 받는 일곱 교회 배후에서 벌어지는 천상의 영적 전쟁을 보여줍니다.
이는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오래된 갈등이 발현된 것으로서 모든 악의 근원을 상징하는 뱀이 여기에서는 용으로 그려집니다. 이 용이 한 여자와 그녀의 자손을 공격하는데 그들은 메시아와 그분의 백성을 의미하죠. 그 후 메시아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용을 물리치시고 용은 땅으로 내쫓깁니다. 거기에서 용은 메시아의 백성에 대한 증오와 박해를 부추깁니다. 하지만 그들은 비록 죽임을 당할지라도 용의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그를 이길 것입니다.
요한은 교회들에게 진짜 원수는 로마도 다른 어떤 나라나 인간도 아님을 보여주려는 것인데요. 그것은 바로 악한 영의 어두운 세력들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죽임 당한 어린양처럼 진실하며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승리를 선포할 것입니다.
요한의 다음 환상은 동일한 갈등을 이번에는 다니엘의 짐승 환상의 상징을 통해 재현합니다. 요한은 여기에서 권세를 위임받은 두 짐승을 봅니다. 그중 한 짐승은 폭력을 사용해 정복하는 국가적 군사력을 나타내고 다른 짐승은 이 힘을 신성한 것으로 높이는 경제적 선동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짐승들은 나라들의 전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데 그것은 짐승의 표와 그 수인 666을 이마나 손에 받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이 악명 높은 이미지는 겉으로만 봐서는 그 의미를 알아내기 어렵죠. 요한은 여기서 분명히 히브리 구약 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표는 쉐마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이마와 손에 쓰인 것은 명백히 쉐마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이것은 신명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대 유대교의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또한 모든 생각과 행동을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상징으로서 이마와 손에 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반역하는 나라들은 충성을 요구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누구를 따를지 결정하라고 강요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짐승의 수는 수천 년 동안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 왔는데요, 요한에게는 그러나 신비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사용했는데 히브리어는 글자마다 숫자 값이 있었습니다. 헬라어 단어인 네로황제와 짐승을 히브리어로 표기한 후 숫자 값을 더하면 각각 666이 됩니다
다만 요한은 지금 네로만이 이 환상의 성취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네로는 오래전 다니엘이 보여준 유형의 최근 사례일 뿐이죠. 다시 말해 나라들이 자기 힘과 경제적 안정을 거짓 신으로 높이고 전적인 충성을 요구할 때 난폭한 짐승으로 변하고 만다는 건데요, 바벨론은 다니엘 시대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뒤를 이어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지금 요한의 때에는 로마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유형은 이 같이 행동하는 후대 모든 나라의 적용됩니다.
짐승 같은 나라들과 용의 반대편에 서 있는 다른 왕이 있습니다. 바로 죽임 당한 어인 양입니다. 그분을 따르기 위해 삶을 바친 그분의 군대와 함께 말이죠. 그리고 요한이 영원한 복음이라고 부르는 승리의 노래가 새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열방으로 흘러갑니다. 또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무너질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외칩니다.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후 요한은 최후 심판의 환상을 보는데요. 그것은 두 번의 추수로 상징됩니다. 하나는 곡식 추수로써 왕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분의 신실한 백성을 모으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포도송이 추수로써 악에 취해 있는 인류를 나타냅니다.
그들은 포도주 틀에 던져져 밟힙니다. 이 모든 표징을 통해 요한은 일곱 교회 앞에 단호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유혹에 저항하고 어린양을 따를까요 아니면 짐승을 따르고 패배를 겪게 될까요. 이제 선택은 분명합니다. 요한은 일곱 대접을 붓는 것으로 상징되는 마지막 일곱 심판을 재현합니다
15-16 | 일곱 대접
어린양의 두루마리 와 표징들을 통해 우리는 이제 열방에 많은 수가 회개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재앙이 일곱 대접을 통해 또다시 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바로처럼 저항하고 하나님을 저주하죠. 그렇게 여섯째 대접에 이르면 용과 짐승이 하나님의 백성에 맞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모든 나라를 아마겟돈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모읍니다.
이곳은 이스라엘 북쪽의 평원으로서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의 침략에 맞서 많은 전투를 치렀던 곳인데요. 어떤 사람들은 이 여섯째 대접이 미래의 실제 전쟁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쪽이든 요한은 분명히 에스겔서에서 나온 곡과 하나님의 전쟁의 이미지를 사용했는데요, 곡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항하기 위해 그분 앞에 모인 반역한 나라들에 대한 에스겔의 상징이죠. 그리고 그게 바로 일곱째 대접에 나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날에 대한 네 번째이자 마지막 묘사로써 악이 열방 가운데서 단번에 그리고 완전히 패하는 날이죠. 지금까지 요한은 어린양의 열린 두루마리에 담긴 메시지를 모두 펼쳐 보였는데요.
이제 그는 앞서 소개했던 세 개의 힘 주제로 돌아가서 바벨론의 멸망, 악에 대한 마지막 전쟁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도래에 관해 자세히 다룹니다
그리고 각 주제는 마지막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봅니다. 먼저 바벨론의 멸망입니다
17-19전 | 바벨론의 멸망
천사가 요한에게 마치 여왕처럼 옷 입은 놀랍도록 매혹적인 한 여인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녀는 순교자들과 모든 무고한 사람들의 피해 취해 있습니다
그녀는 표징들에 등장했던 용 같은 짐승을 타고 있는데 이는 반역하는 나라들을 상징하며 그녀는 음녀 바벨론이라고 불리죠. 이 환상의 자세한 상징들은 요한 당대의 독자들에게 아주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닙니다. 이 환상에서 요한은 고대 바벨론, 두로 그리고 에돔의 멸망에 관한 모든 구약 성경 구절의 표현과 이미지들을 한데 섞어 놓았는데요, 그는 어떻게 로마가 그저 하나님께 반역한 인류의 구약적 전형을 읽고 있을 뿐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안정과 군사 안보를 거짓 신으로 삼고 높이는 나라들을 규합합니다. 이는 과거나 미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틀어 발견되는 인간 실체의 자화상이며 이러한 바벨론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바벨론을 그분의 나라로 바꾸실 그날에 이르기까지 생겨나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 걸까요. 지금까지 여호와의 날은 불, 지진 또는 추수로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두 번에 나누어 마지막 전쟁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순교자들은 신원을 받습니다.
19:11-21 | 마지막 전쟁
이제 요한은 우리를 다시 여섯째 대접으로 데려갑니다. 거기에 모든 나라가 하나님께 대항하기 위해 모여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위대한 영웅으로서 백마를 타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세상의 악을 물리칠 준비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주목해 보세요. 그물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피 묻은 옷을 입고 계신데요 그건 바로 그분이 흘리신 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유일한 무기는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검이며 이는 이사야서에서 온 이미지입니다.
요한은 아마겟돈이 피의 전쟁이 아닐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원수들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신 그 예수님이 이제는 공의를 선포하러 오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선한 세상을 파괴하는데 참여하고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세상에 지펴 놓은 파멸의 지옥 불은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공정하게 그들의 운명이 됩니다.
20:1-7 | 순교자들의 신원
다음으로 요하는 바벨론에게 죽임 당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환상을 봅니다. 그들은 다시 살아나서 메시아와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립니다.
20:8-15 | 마지막 전쟁 II
이후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인류를 붙였던 그 용이 온 세상에 나라들을 집결해서 하나님 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그들은 영원한 패배의 결과에 직면합니다.
그래서 악한 영의 세력들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멸망하고 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대로 스스로 존재하고 자기만을 위한 삶을 얻게 됩니다.
용과 바벨론 그리고 그들을 선택한 모든 사람은 영원히 결박되어 다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 세계를 더럽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년이라는 시간과 이 두 전쟁의 관계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쟁이 존재하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순차적인 사건들이 라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 다음에 천년 왕국이라고 불리는 기관이 오고 그의 뒤에 하나님의 최우 심판이 있다고 말이죠.
한편 어떤 사람들은 천 년은 악한 영에 대한 예수님과 순교자들의 현재 승리의 상징이며 두 전쟁은 미래의 예수님의 재림을 두 개의 다른 각도에서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관점을 취하된 핵심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왕으로서 다시 오실 때 악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며 그분께 신실했던 자들을 신원하실 것입니다.
21-22 | 하늘과 땅의 혼인
요한계시록은 하늘과 땅의 혼인에 대한 마지막 환상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언약 백성과 영원히 하나가 될 새 창조 세계를 상징하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신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인류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유한의 환상은 구약의 약속들로 대 향연을 이룹니다. 이곳은 새 하늘과 새 땅, 즉 인류 역사의 고통과 악이 사라진 회복된 창조 세계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낙원, 새 애덴동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에덴동산을 되돌려 놓은 게 아닙니다. 인류의 문화와 그들의 온갖 다양성이 하나님과 평화롭고 조화롭게 협력하는 위대한 도시인 새 예루살렘으로 진보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반전 중 하나는 새 창조 세계에 성전 건물이 없다는 것인데요, 한때 성전으로만 제한됐던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가 이제는 새로운 세상 구석구석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기에는 성경의 첫 장에서 인류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취한 새 인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그들은 세상을 다스리며 그분의 동역자가 되어 이 참조 세기를 세운 미지의 영토로 만들 것입니다.
요한은 마치 암호처럼 우리에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를 해독해 보라고 이 책을 쓴 게 아닙니다. 이 책은 1세기의 일곱 교회와 그 후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소망과 도전을 가져다준 상징적인 환상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일정한 유형과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냅니다.
인간이 세운 모든 왕국은 결국 바벨론이 되며 반드시 어린양이 힘을 의지해 저항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 약속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죽으신 예수님이 바벨론을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언젠가 다시 오셔서 그분의 선한 세상에서 악을 없애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이 왕이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동기가 되어 줄 것입니다.
<바이블프로젝트 - 요한계시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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