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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

 

(1) 신구약 중간사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말라기 선지자부터 세례요한의 등장 사이에는 400여 년이라는 시간이 존재한다. 성경만으로는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을 알 수 없다. 이 400여 년의 시간을 신구약 중간사 혹은 중간기라고 부른다.

 
신약성경 이해의 첫 단추


신약성경은 많은 왕조의 발흥과 쇠퇴를 단숨에 뛰어넘고 거대 제국 로마로 바로 안내한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구약에서 발견할 수 없는 유대교의 분파들을 만나고, 수전절 같은 새로운 절기를 보게 된다. 분봉왕, 회당 등 낯선 단어도 발견한다. 때문에 성경, 특별히 신약을 이해함에 있어 신구약 중간사에 대한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 역사·문화적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첫 단추가 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은혜를 베푸셨을 때 팔레스틴은 유대와 사마리아, 갈릴리의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다. 이러한 성경상의 분할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신구약의 중간사 시기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지리와 역사, 종교적 발전을 연구할 때 얻어 진다.

그리스도를 보내기 위한 준비 기간

신구약 중간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400여 년의 기간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비적 차원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가 찼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때”란 무엇일까? 약 40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학자들은 중요한 몇 사건을 공통으로 언급한다. 첫째,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부터 소위 ‘오현제'라 불리는 다섯 명의 황제가 통치할 때까지의 약 200년간 계속된 로마의 평화를 뜻한다. 외국과의 크고 작은 전쟁과 내부의 반란 등 군사적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로마가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린 시기임은 분명하다. 

로마는 이 기간 동안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기보다 국경을 요새화해 수비하는 데 집중했다. 그에 걸맞게 군대를 재편하는데 공병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자연스레 보병은 쇠퇴하게 된다. 육성된 공병은 로마의 토목공사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 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약 28만km의 잘 뻗은 도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탄생시켰다. 이 길은 사도 바울과 많은 전도자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둘째, 언어의 통일과 70인역의 탄생이다. B.C. 336년, 약관의 한 젊은이가 암살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게도냐의 지도자로 등극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 아래 놓은 전쟁의 전문가 필립포스 2세였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필립포스 2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반란군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게도냐인 이었지만 그리스의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한 여러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 문화를 탄생시킨다.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의 전파자로 기록한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 등을 많이 사용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를 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통용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또한 통일된 헬라어로 70인역이 탄생했다. 70인역이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을 말한다.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라고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70인역에 대한 작업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B.C. 285∼247년경 이루어졌다고 알려진다. 70인역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세기는 유대인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던 시대였다. 초대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몰랐다. 만약 70인역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헬라어는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성경은 여러 헬라어 종류 중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편에 속했던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이 역시 복음이 대중적으로 전해지는 데 크게 기여한 요소였다.

 

(2)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사울, 다윗, 솔로몬이 40년씩 통치함으로 120년간 유지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양분된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포함 19명의 왕이 다스리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남유다는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20명의 왕이 통치하다 B.C. 586년, 바벨론에게 망하게 된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크고 작은 이방의 침입을 받았지만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적은 없었다.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

B.C. 8세기. 유프라테스강 넘기를 번번이 실패했던 앗수르가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국 건설의 중심에는 디글랏빌레셀 3세라는 강력한 왕이 있었다.  

앗수르가 점점 강성해 지는 시기에 이스라엘의 상황은 참혹했다.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암살이 이어졌고 10년 사이에 다섯 명의 왕이 교체되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가 침공하자 조공을 바쳐 왕좌를 지켰다. 므나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브가히야는 불과 2년 만에 부하 베가에 의해 암살당한다.

왕위에 오는 베가는 반앗수르 정책을 펼쳤다. 학자들은 베가의 반역이 친앗수르 정책에 대한 반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베가는 다메섹의 왕 르신, 수리아(아람)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블레셋과 에돔도 동맹군에 합세했다. 동맹군은 남유다도 함께 하길 원했지만 유다는 이를 거절했고 동맹군의 칼은 유다를 먼저 겨눴다. 당시 유다의 왕은 아하스였다.
 
동맹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지만, 생각만큼 빠르게 성을 정복하지 못했다. 아람과 다메섹은 성 인근의 도시와 수비대 정도만 무력화시킨 후 북이스라엘을 남겨두고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아하스는 이스라엘을 꺾을 기회라고 생각해 남아있는 북이스라엘과 전투를 벌였지만 대패하고 만다.

 

더 이상 왕권을 유지할 힘이 없었던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바치면서 도움을 요청한다(왕하 16:7,8). 디글랏빌레셀 3세는 그 길로 수리아를 공격해 초토화 시킨 다음 다메섹을 점령하고 르신 왕을 죽였다. 또한 다메섹 백성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앗수르 인들을 이주시켰다(왕하 16:9).

이 와중에 북쪽 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호세아는 자신의 친구 베가를 살해하고 북이스라엘의 19번째 왕에 오르게 된다. 호세아는 티글랏빌레셀 3세가 죽고 살만에셀 5세가 앗수르의 왕위에 오르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한다. 

결국 호세아의 잘못된 판단은 역사가 그를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라고 기록하게 만들었다. 살만에셀 5세가 공격해왔다.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성에서 약 3년을 버텼지만, 결국 함락 당했다. 사마리아를 함락한 살만에셀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가 북이스라엘을 철저히 짓밟았다.  

북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혼합되어 사는 지역으로 변했다. 앗수르는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거주하게 만들었다(왕하 17:24).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그리고 남아있는 이스라엘은 이제 이방민족과 합쳐진 혼혈민족이 되고 말았다. ‘사마리아인’의 탄생이었다.

 
앗수르의 몰락과 바벨론의 급부상

앗수르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앗수르는 속국들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다스렸다. 앗수르와 일대일로 맞설 나라는 없었지만, 공공의 적에 대한 증오로 힘을 합칠 나라들은 있었다. 앗수르의 몰락은 사르곤 2세, 산헤립, 에살핫돈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슈르바니팔 때에 본격화된다.

아슈르바니팔의 형 샤마이 슘 우킨은 앗수르의 속국인 바벨론의 지도자였다. 샤마이 슘 우킨은 리디아, 시리아, 애굽 등과 연합전선을 펼쳐 앗수르를 압박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연합군을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샤아미 슘 우킨은 사망했지만 앗수르는 많은 힘을 소진했다. 이 와중에 아슈르바니팔 사망 후 아들 신 사르 이스쿤과 반란자 아슈르 에틸 일라니 사이에 일어난 수 년 간의 왕위 다툼은 앗수르의 쇠퇴를 가속화 시켰다.
 
바벨론은 다시 기회를 잡았다. 신바벨론의 창건자라 불리는 나보폴라살은 B.C. 612년 니느웨를 공격해 3개월 만에 점령했다. 앗수르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앗수르 병력이 하란으로 도망가 항전을 펼쳤지만, 바벨론은 가볍게 그들을 제압했다. 어떤 열방의 신도 앗수르의 정복을 막은 적이 있었느냐고 큰 소리 치던(사 36:18∼20) 앗수르의 교만은 그렇게 꺾였다.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

B.C. 609년, 애굽의 왕 느고 2세는 갈그미스에서 최후의 항쟁을 펼치는 앗수르로부터 도움을 요청받는다. 바벨론의 급부상에 위기를 느낀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 원정길에 오른다. 남유다의 16번째 왕 요시야가 애굽의 원정길을 막아섰다.

 

요시야는 애굽의 출정을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본인도 전사한다. 애굽은 서둘러 갈그미스로 향해 앗수르와 합류했으나 전쟁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화가 난 느고 2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며 요사야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데려갔고,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켜 왕으로 앉혔다.

B.C. 605년, 느고는 다시 한 번 갈그미스로 향한다. 이번에도 승자는 나보폴라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이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돌아가며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끌려가게 된다. 유다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거쳐 포로로 끌려가고 세 차례에 거쳐 귀환하게 되는데, 그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유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은 18대왕 여호야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B.C. 601년, 바벨론은 애굽과 다시 한 번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애굽과 바벨론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된다. 이때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과 손을 잡는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속국 이었던 모압, 암몬, 아람 등을 이용해 유다를 치고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죽는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데 이것이 2차 포로였고 이때 에스겔 선지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37년 만에 풀려나 죽을 때까지 좋은 지위를 누리며 살게 된다(왕하25:27∼30). 

여호야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B.C. 587년. 바벨론은 유다로 진격해 18개월 동안 예루살렘 성을 둘러쌓다. 예루살렘성은 기근이 심하여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왕하 25:1∼3) 더는 버틸 힘이 없었던 유다는 제대로 된 저항한 번 하지 못한 채 철저하게 짓밟힌다. 

느부갓네살의 신복인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 25:8∼11).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된다(왕하 25:7).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유다에 남은 자들

바벨론은 유대 땅에 일부 백성들을 남겨두었다.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어서 반역은 생각지도 못했다. 바벨론은 남은 자들을 다스릴 총독으로 그달리야를 임명했다. 그달리야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렘 26:24).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에서의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동행하길 권했지만, 예레미야는 거절하고 황폐한 유대 땅에 남았다. 바벨론의 군대가 철수하자 바벨론을 피해있던 무리들이 다시 돌아오는데 그중 요세푸스가 사악하고 교활하다고 표현한 이스마엘이 그달리야를 암살한다. 

 

그달리야가 총독이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웠던 유다 백성은 대부분 애굽으로 피신하게 된다(왕하 25:25∼26). 이제 유다 땅은 텅 비어버렸다. 한편, 애굽으로 내려갔던 일부 유다 백성은 약 5년 뒤에 애굽으로 쳐들어온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3) 바벨론의 몰락과 페르시아 치하의 유대인 포로 귀환

앗수르와 애굽을 누르고 패권을 차지한 바벨론은 제국을 한 세기도 유지하지 못했다. 바벨론의 강력한 지도자 느부갓네살의 퇴장은 왕좌를 탐하는 이들의 죽고 죽이는 피바람을 불러왔다.
 
바벨론의 불안한 국내 정세

느부갓네살 사후 7년 동안 바벨론의 왕은 세 번이나 바뀌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 아멜 마르둑(성경에는 에윌므로닥으로 기록)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매부인 네르갈 사르 우슬에게 살해된다. 네르갈 사르 우슬의 통치도 길지 못했다. 그는 4년 만에 죽게 되는 데 뒤이어 성인이 되지 않은 아들 라바시 마르둑이 왕좌에 오른다. 미성년자 왕은 단 몇 개월 만에 반대파에 의해 숙청당한다. 라바시 마르둑을 제거한 이는 아람계 귀족 가문의 나보니두스였다. 왕권은 이제 느부갓네살 가문에서 새로운 가문으로 넘어갔다.
 
종교를 둘러싼 갈등

왕이 된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에 종교 갈등을 불러왔다. 자신의 어머니가 숭배하는 달의 신인 신(sin)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 느부갓네살 때부터 마르둑(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을 바벨론의 수호신으로 믿던 바벨론인들은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마르둑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종교 문제는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나보니두스는 종교 생활을 위해 거처를 옮기고 그의 아들 벧 사르 우슬(성경에는 벨사살로 기록)에게 통치권을 넘겨버렸다. 문제는 바벨론에서 매년 열리는 신년 축제인 아키투가 나보니두스의 부재로 중단되었다는 점이다. 아키투는 바벨론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아키투의 중단은 나보니두스가 민심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벨론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순탄하게 바벨론을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은 지나버렸다. 

고레스의 등장과 바벨론의 몰락

바벨론의 위협이 되는 존재는 이란 북서부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메디아였다(성경에는 메대라고 기록). 이들은 바벨론의 땅을 호시탐탐 노렸고 두 국가는 간헐적으로 충돌했다. 그런데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라고 기록)에 고레스(키루스 2세)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 고레스는 메디아를 장악하고 근방의 국가들을 빠른 속도로 자신의 발아래 두기 시작했다.
 
나보니두스는 고레스를 겁내어 이집트, 리디아와 동맹을 맺지만 고레스는 리디아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고레스는 바로 바벨론을 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이전의 어느 나라보다 훨씬 거대한 제국을 창건”했다.

고레스는 바벨론으로 진격해왔다. 혼란한 바벨론은 고레스를 막을 힘이 없었다. 엘람 지방의 바벨론 장군 고브리아스는 고레스에게 투항한 뒤 고국에 칼을 들이밀었다. 나보니두스는 사력을 다해 바벨론을 지키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B.C. 539년. 고레스는 손쉽게 바벨론으로 입성했다.

한편, 고레스는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였다.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의 딸 만다네가 많은 양을 오줌을 누어 도시와 아시아가 잠기는 꿈을 꾼다. 마고스(메디아의 사제)들의 해몽을 듣고 겁이 난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페르시아인과 결혼시켜 페르시아로 보낸다. 만다네를 보낸 첫 해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의 생식기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꾼다. 아스키아게스는 만다네를 메디아로 불러들이고 심복 하르파고스에게 만다네가 자식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하르파고스는 아이를 살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였다.

 
고레스의 관용정책

고레스의 정책은 피지배층을 강하게 억압하던 앗수르나 바벨론과는 달랐다. 고레스는 일찍이 바벨론으로 붙잡혀온 민족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그들의 종교도 인정했다. 특히 마르둑을 섬기는 제사에 참석해 바벨론인들로 부터 지지를 이끌어냈다.

 

 

▲고레스의 무덤.&nbsp;고레스는 파르스에 제국의 수도인 파사르가대(현재의 이란)를 세웠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출처:&nbsp;위키피디아).

 


고레스는 각 나라의 독립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군주를 두고 행정 책임을 맡기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고레스의 정책은 페르시아 치하의 국가들의 결속력을 높이며 성공을 거뒀다.
 

포로귀환

하나님은 고레스의 탄생 15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고레스의 등장을 말씀하셨고(사 45:1〜8)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알려주셨다(렘 29:4〜14).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고 성전을 건축하도록 배려했다(대하 36:22〜23).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부터 세 차례에 거쳐 포로로 끌려가는데, 귀환 역시 세 차례에 거쳐 이루어진다.

B.C. 537년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등이 중심이 된 1차 귀환을 시작으로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2차 귀환이 B.C. 445년에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3차 귀환이 이루어진다. 페르시아 즉 옛 바벨론 땅에 남아있기를 자처한 이도 많았다. 고국에 대한 열망이 적은 바벨론 포로 2세대들은 굳이 황폐한 땅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한편, ‘유대인’은 구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바벨론이 유다 땅에서 붙잡아온 사람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었다. 바벨론 포로기 부터 유대인은 특정 지역에서 통일된 사상과 관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기 어려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라엘 밖 유대인은 증가했다. 이들을 흔히 ‘디아스포라’(그리스어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떠난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말)라고 부른다.



(4)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제대로 된 시장 하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던 페르시아는 메디아와 바벨론까지 흡수하며 황금의 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페르시아는 바벨론에 의해 끌려온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지방화 정책을 펼쳤다. 속국을 혼혈족으로 만든 앗수르와, 포로를 나라별로 구별해 강력한 중앙 집중화를 이룬 바벨론과는 분명 다른 정책이었다. 유대인 역시 세 차례에 걸쳐 본토로 귀환하게 된다. 물론 귀국을 희망하지 않는 자들은 계속해서 페르시아에 머물 수 있었다.

초대왕 키루스 2세(고레스)이후 왕이 된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왕으로 다레이오스 1세가 오르게 된다. 다레이오스 1세의 아들이 에스더의 남편 크세르크세스(영화 300에 나오는 페르시아의 왕으로 성경에는 ‘아하수에로’로 기록)이다. 페르시아는 크세르크세스 치하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고 알려진다.


실패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다레이오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는 각각 두 차례와 한 차례 도합 세 차례에 걸쳐 그리스 점령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먼저 1차 침공. B.C. 492년, 다레이오스 1세는 마르도니오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여 그리스를 침공하게 했다. 그런데 변수를 만났다.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함대가 풍비박산 나버렸다.

2년 뒤 다레이오스 1세는 다시 한번 전열을 정비하고 그리스 정복에 나섰다. 아테네를 목전에 둔 마라톤 광야에 다다를 때까지 페르시아는 거침이 없이 방해요소들을 처단했다. 치열했던 마라톤 광야에서의 전투는 아테네의 승리로 돌아갔다.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측은 약 6,400명이 전사하고, 아테나이(아테네) 측은 192명만이 전사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서둘러 배로 돌아와 아테네 군대보다 빠르게 아테네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아테네 군사들이 먼저 행동해 계획을 철회 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는 2차 원정에서도 패했다.

다레이오스 1세의 1, 2차 원정이 실패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2차 원정이 있은 지 10년 후인 B.C. 480년, 3차 원정길에 오른다. 16만 명의 군사와 1,200여 척에 이르는 함대. 그야말로 대군 이었다. 육지에서 페르시아의 압승이 이어졌다. 그런데 육지에서와 달리 해전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지도자로 급부상한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 하에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이후 강력한 해군을 양성한 상태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해군을 살라미스 섬 인근의 좁은 해협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소위 세계 4대(혹은 3대) 해전 중 하나로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이고, 아테네는 이 해전의 승리로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해전에서 완패한 페르시아는 승승장구하던 지상전에서도 잇따라 패배해 그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의 세 번에 거친 그리스 침공은 큰 상처만 남기고 마무리 되었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기 때의 유대인

페르시아의 초대 왕 키루스 2세 때인 B.C. 537년,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1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키루스 2세에 이어 왕에 오른 캄비세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다레이오스 1세 때 학개, 스가랴 등이 대적자들의 방해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재건 사업을 완수하게 된다. 에스더의 남편이었던 크세르크세스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 1세 때인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포로귀환이, B.C. 444년,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3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진다.



(5) 알렉산드로스와 헬라제국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세 번에 걸친 침공을 막아냈다. 그중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로 양성된 해군으로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강자로 부상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고, 페르시아 치하의 그리스인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앞세운 아테네를 중심으로 동맹을 형성했다. 동맹국들의 기금을 보관하는 금고가 델로스 섬에 있다고 하여 델로스 동맹이라고 불렸다. 델로스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금을 보관하는 장소가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로 옮겨졌고 동맹국 내의 아테네의 입김은 더욱 세졌다. 자연스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테네가 도시 국가의 중심이 될 때부터 델로스 동맹이 체결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탐탁지 않게 지켜보던 스파르타는 이들의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반대하는 도시 국가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었다. B.C. 431년,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공격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27년간 진행되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27년의 전쟁은 실상 그 누가 승자, 패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쇠락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등장

절대 강자가 없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패권은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테베에서 마게도냐로 넘어간다. 마게도냐에 등장한 강력한 부자(父子)로 이제 그리스는 하나로 통합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에 의해 전쟁의 천재라고 불린 필립포스 2세는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 아래로 굴복시켰다. 그런데 필립포스 2세의 전성기는 길지 못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전쟁의 전문가가 죽자 반란을 일으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혼란이 다시 한번 그리스 도시 국가에 찾아왔다.
 
반전이 일어났다. B.C. 336년, 필립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마게도냐의 지도자로 등극한 약관의 한 젊은이는 반란군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이탈리아 폼페이 카사 델 파우노(Casa del Fauno) 유적 벽면에 묘사된 알렉산드로스(B.C. 356 ~ B.C. 323)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오 3세(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치하의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다리오 3세는 급히 도망쳤는데,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오 3세를 쫓지 않고 지중해와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중 두로는 7개월 동안 결사 항전을 벌였지만 항복하지 않았다는 대가로 대학살을 당하고 말핬다. 이후 블레셋의 가사, 시리아 등을 점령한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페르시아의 본토를 점령하고 명실상부 제국의 대왕이 되었다.

 
대왕이 이루어놓은 제국

알렉산드로스는 마게도냐인 이었지만, 그리스의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한 여러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 문화를 탄생시킨다.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의 전파자로 기록한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 등을 많이 사용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를 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통용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6) 프톨레마이오스와 유대인 그리고 70인역

정복자 안렉산드로스의 삶은 그리 길지 못했다. B.C. 323년, 그는 삼십 대 초반의 나이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했다. 알렉산드로스가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은 탓에 왕국은 혼란에 빠졌다. 대왕이 이루어놓은 왕국을 소유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분열된 왕국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그의 아내 록산나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지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장수들은 록산나와 아들을 살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셀류쿠스는 동맹을 맺고 알렉산더를 뒤이어 통치자가 되려는 안티고누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프톨레미오스는 애굽, 카산드로스는 마게도니야, 리사마코스는 수리아, 셀류쿠스는 바벨론의 속국들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를 받게 된 유대인

유대인들은 갈라진 왕국 중에서 먼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이주시켰다. 학자들은 이당시 본토에 살고 있는 유대인보다 팔레스타인 테두리 밖에 사는 유대인들이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본다. 특히 애굽에서는 흩어진 유대인 중 가장 규모 있는 공동체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점차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셀류쿠스 왕조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애굽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치하를 받기까지 약 120년간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왕조 사이의 전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70인역의 탄생

70인역이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70인역에 대한 작업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두 번째 왕인 프톨레마이오스의 2세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다고 알려지는데,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작업을 했다고 한다.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라고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로 불리기도 한다.  

70인역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헬라 문화권에서 살게 된 유대인들은 점차 히브리어를 잊어갔다. 때문에 1세기는 유대인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던 시대였다. 초대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몰랐다. 만약 70인역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7) 셀류쿠스 왕조와 유대인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제국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유대인들은 분열된 나라 중 먼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왕조 아래 약 120년을 지낸 유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 휘말리며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맞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셀류쿠스 왕조로

셀류쿠스 왕조의 탁월한 왕으로 꼽히는 안티오쿠스 3세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부를 축적했다. 그는 B.C. 198년, 파네아스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를 격파하고 유대 땅을 손에 놓는다. 당시 유대는 셀류쿠스의 편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를 몰아내는 데 힘을 모았다.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다 년간 세금 면제 및 도시와 성전 재건 등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향한 셀류쿠스의 호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로마에 패배한 셀류쿠스

당시 셀류쿠스 왕조에는 한때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장군이 망명을 와 있었다. “반드시 로마를 쓰러트린다”라는 한니발의 평생의 꿈 때문이었을까. 안티오쿠스 3세는 한니발의 격려를 받아 로마와 전투를 벌인다.
 
B.C.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며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셀류쿠스 왕조는 일부 정복지를 포기한다는 조건에 합의했고, 아들 안티오쿠스 4세를 볼모로 내어 주었다. 결정적으로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배상금 문제로 셀류쿠스 왕조는 피지배 계층,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거두었다.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신전의 재산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을 강탈했다. 안티오쿠스 3세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셀류쿠스 4세 역시 10여 년의 통치 끝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안티오쿠스 에피마네스!

셀류쿠스 4세가 죽자 로마의 볼모로 잡혀있던 그의 동생 안티오쿠스 4세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흔히 안티오쿠스 4세는 현명한 신(혹은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의 에피파네스를 붙여 자신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 지칭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에피마네스를 붙여 안티오쿠스 에피마네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에게 상당량의 돈을 지불한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성직 매매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후 메넬라우스는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야손의 자리를 빼앗았다. 이 같은 성직 매매는 이후 예루살렘 멸망까지 이어졌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동전



본격적인 유대인 박해

안티오쿠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스리는 애굽을 점령하길 원했다. 그는 여러 차례 애굽에 선전포고 후 전쟁을 했는데, 두 번째 전쟁에서 유대 땅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안티오쿠스 4세가 전쟁 중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메넬라우스에게 대제사장 자리를 빼앗긴 야손은 이 기회를 틈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안티오쿠스 4세는 야손의 이 같은 행위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피의 보복을 감행했다. 성전의 기물을 약탈했고, 인두세, 성전세 등 다양한 명목의 세금이 과중하게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다시 애굽과 전투를 벌였지만, 로마의 지원을 받은 애굽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굴욕을 맛본 안티오쿠스 4세는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명목을 씌워 분풀이를 시작했다.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파견된 아폴로니우스와 2만 2천 명의 군대는 예루살렘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아크라’라는 요새를 세워 유대인을 감시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안식일을 지키지 말 것, 할례를 하지 말 것, 율법서를 소유하지 말 것 등 유대인들의 신앙의 근간을 뿌리 뽑을 만한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다. 그는 과거 로마에 볼모로 있으며 그리스 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를 헬라화 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와 칙령, 헬라화 계획은 유대인의 반발을 샀다. 그럴수록 안피오쿠스 4세의 박해는 심해졌고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희생당한 이들은 대부분 하시딤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하시딤이란 경건한 자들이라는 뜻으로, 유대의 헬라화와 성직 매매, 안티오쿠스 4세의 칙령에 반대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도 메넬라우스는 유대의 헬라화에 앞장섰고 성전에서 제우스에게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럴수록 하시딤은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고 헬라화 정책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는 한 가문의 주도하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8) 망치질 하는 자

안티오쿠스 4세(이하 안티오쿠스)의 박해와 헬라화 정책은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골만 깊게 만들뿐이었다.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안티오쿠스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반란은 한 제사장의 결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과 욥바 사이에 위치한 모딘 이라는 지역에 자신의 신하를 보내어 이방신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딘 지역의 제사장이었던 하스몬 가문의 마타디아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깨트리는 일을 금하고 계신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 치우쳐 우리가 드릴 경배를 버리라는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라며 왕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한다. 한 유대인이 마타디아를 대신해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러 제단으로 나오자 마타디아는 그를 죽이고 추종자들과 함께 안티오쿠스의 보복을 피해 산으로 숨었다.
 
마타디아와 추종자들은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결사 항전을 벌였다. 
 
마타디아는 약 1년간 항전을 이끌다 사망했고, 그의 다섯 아들 중 셋째아들인 유다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 유다가 후대에는 마카비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마카비는 망치질하는 자(혹은 쇠망치)라는 뜻으로 유다의 별명이었다.
 

마카비의 연전연승과 성전정화


마카비는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게릴라 항전은 이들에게 계속된 승전보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사마리아 땅의 지도자인 아폴로니우스와 수리아의 지도자 세론을 차례로 격파한 사건은 유대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며 하시딤들과의 연합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안티오쿠스는 또 다른 전쟁을 위해 원정을 가있던 터라 주력 병력을 마카비와의 전쟁에 투입시킬 수 없었다. 두 차례의 참패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는 리시아스에게 마카비의 반란군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리시아스는 그의 부하인 니카놀과 게올기아스를 지휘관으로 삼고 보병 4만 6000명,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들 옆에는 반란군을 진압한 다음 노예로 팔겠다는 노예상인들도 동행했다.
 
전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게릴라전에 능한 마카비의 승리로 끝났다. 마카비는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니카놀의 부대를 급습해 큰 피해를 입히는 동시에 노예상인들을 잡아 오히려 노예로 팔아버렸다.
 
  
또다시 혼란 속으로


니카놀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마카비는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B.C. 164년 기슬르월(유대력 9월, 그레고리력 11-12월) 25일, 마침내 마카비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날을 수전절(요10:22)혹은 하누카라고 부른다. 이들은 성전 모독을 끝낸 기념을 3년간 이어갔다.
 
평화도 잠시. 예루살렘을 둘러싼 거센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리시아스는 다시 한 번 마카비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이 전쟁에서 마카비의 형제인 엘르아살이 사망하고 만다, 리사아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해 마카비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지만 때마침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시아스는 안티오쿠스가 전쟁 중에 사망했고 후계자로 필립 장군을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복보다 권력이 먼저였던 리시아스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협정서를 내밀고 급히 회군했다.
 
리시아스의 화해 정책을 두고 하시딤은 이를 반색했지만 마카비의 입장은 달랐다. 결국 다수의 하시딤에 의해 화해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로 인해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하시딤의 선택은 자신들과 마키비 가문 둘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안티오쿠스의 후계자로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돌아와 세워졌다. 그는 리시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알키무스를 세웠다. 알키무스는 예루살렘에서 60여 명의 하시딤을 죽였다. 이 일로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다시 뭉쳤다. 이들은 알키무스가 원군으로 요청한 시리아 군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데메트리우스 1세가 예루살렘으로 보낸 군대와의 전투에서까지 승리할 힘은 없었다. 마카비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9) 독립 왕조의 시작과 끝

 

독립 왕조의 시작

 

하스몬 가문의 제사장 마타디아로부터 시작한 혁명은 유다(마카비), 요나단, 시몬으로 이어졌다. B.C. 142년, 이들은 셀류쿠스 왕조로부터 독립을 이루게 된다. 시몬이 암살당하며 그의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가 유대 민족의 지도자 겸 대제사장이 되었다.
 
요한 힐카누스는 주변 지역, 그중에서도 에돔과 사마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에돔을 정복하고 에돔 사람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기도 했고, 사마리아를 정복해 그리심 산의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했다. 특히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한 행위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을 서로 원수로 만들었다.
 
귀족들에게 지지를 받은 힐카누스는 과거 솔로몬이 통치했던 영토와 유사한 크기의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사두개인을 자처한 힐카누스는 자신이 발행한 주화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은 최초의 군주였다. 

로마, 유대인을 통치하기 시작하다


요한 힐카누스가 에돔 땅을 정벌했을 때, 유대교로 개종한 한 가문에서 태어난 헤롯 안티파터(훗날 헤롯 대왕의 아버지)는 힐카뉴스 2세에게 왕위를 재탈환 할 것을 종용했다. 그는 나바티안의 왕 아레타스의 도움을 받아 힐카누스 2세의 왕위 탈환을 성공적으로 도왔다. 이후 두 형제는 끊임없이 왕좌를 두고 충돌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두 사람 모두 로마에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고 호소하게 된다. 로마에는 전쟁의 영웅 폼페이우스가 있었다.
 
유대의 상황은 묘하게 진행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힐카누스 2세는 폼페이우스에게 서로 자신이 통치자라고 주장했고, 권력에 눈 먼 형제들에 지친 유대의 지도자들은 폼페이우스에게 두 형제를 몰아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폼페이우스는 힐카누스 2세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끝까지 폼페이우스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폼페이우스와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폼페이우스는 힐카누스 2세에게 대제사장직을 주었지만 허울뿐이었다. 형제의 내전의 최대의 수혜자는 헤롯 안티파터였다. 그는 친 로마 정책을 펼치며 로마의 신임을 샀다. 로마는 하스몬 왕가의 모든 영토를 손에 넣고 유대인들을 향한 통치를 시작했다.  

 


 

<조믿음. 신구약중간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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