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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신약성경 - 공동서신 - 히브리서

이 책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신약의 다른 증언들과는 다른 독특한 관점에서 증언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 그의 제사장직의 교리를 확립하는 데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외에도 새 약속과 옛 약속과의 관계성을 포함한 구약의 해석 및 신앙 생활 등과 관련된 무수한 진리들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본 서신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이나 저작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너무도 알려진 것이 없다.

 

 저작 연대

먼저 히브리서는 AD 95년 이후에 쓰여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로마의 클레멘트가 클레멘트Ⅰ서에서 이미 인용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연대를 AD 70년 이후로 잡기도 거의 어려운데, 그것은 히브리서에 예루살렘의 유대 성전의 파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데에 그 근거를 둔다.

만약 본 서신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씌어졌다면, 저자가 구약적인 제사 제도의 종결에 관해서도 분명한 언급을 했을 것인데 오히려 저자는 구약적인 제도가 아직도 기능을 발휘하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8:4, 13; 9:6-9; 10:1-3).

또한 히브리서 2:3이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2대째 기독교인 세대를 의미하고 있다고 볼 필요도 없다. 오히려 본문은 명백히 저자가 이미 알고 있던 디모데의 생존기간(히 13:23)에 쓰여졌음이 분명하다.

만약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면 히브리서 13:23은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디모데는 그의 출옥 후 바울과 합류하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저작 연대는 AD 68년이나 69년으로 추정함이 바람직하다.

 

 신약 속의 레위기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죄를 없애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인간의 죄를 없애는 방법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의 엄격한 희생 제사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동물의 피를 드리는 희생 제사는 인간의 죄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드려야 했다.

반면 신약의 히브리서에는 온전한 제사법이 적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제물 되셔서 인간의 죄를 완전하게 없애신 제사, 즉 단 한 번만으로도 충분한 효력이 있는 제사이다(히 9:12).

히브리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제사법을 적은 ‘신약 속의 레위기’이다(히 9-10장).

 

 히브리서의 수신자

히브리서 서신을 처음 받았던 독자들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떤 특정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즉 이 독자들은 나름대로의 특이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며 저자는 그들의 ‘전날’(히 10:32-34)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그들이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베푸는 과거와 현재의 관대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며(히 6:10), 그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히12:4-6; 13:7-9).

더구나 저자는 그들과 밀착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또한 디모데와 함께 그들을 방문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기도 했으며(히 13:19, 23) 그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히 13:18).

또 이 서신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유대적 원형들(prototypes)과 레위기의 제사 제도의 영원성을 고수하거나 복고하려는 경향에 대해 반대한다(히 7:11-28).

그리고 이방인 신자의 문제가 되었던 할례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는 다루고 있지 않으며 복음으로 돌아온 뒤 믿음에서 타락하여 예전의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위기에 처해 있던(히 6:4-6; 10:26-29, 37-39) 사람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점들로부터 유추해 볼 때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유대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하여

바울 저작설
바울의 저작이라는 전통적 견해는 가장 오래 전부터 주장되어 왔던 것인데, 사실 지금까지도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판테누스(AD 190년경에 사망) 시대로부터 이 서신이 바울적인 요소를 풍기고 있다는 의견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히브리 원어로 본문을 썼고, 후에 누가가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오리겐은 문학 양식의 근본에 있어서 바울의 저작과는 다르다는 측면에서 의심하였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누가 이 책을 썼는가를 아실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바울의 저작이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굳이 맞서려고 하지는 않았다.

바울의 저작설은 근래까지 주로 동방에서 주장되어 왔으며, 또한 제롬과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에서조차 바울 저작설을 대중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문체나 내적인 특징으로 미루어 바울 저작설이 배제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히브리서를 헬라어로 읽을 때 그 안에서 풍기는 영적인 내음에 있어서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의 유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도 사실이나, 아주 미묘하게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전통이 오직 바울만을 그 저자로 증언했다면 이러한 다소 주관적인 추론도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나바 저작설
초대교회 때 이미 바울의 선교 동역자였던 바나바의 저작설이 유포되고 있었음이 그 하나의 예이다. 이 설(說)은 서방의 터툴리안(160/170-215/220)에 의해 제일 먼저 제기되었다.

그는 한 논쟁적인 글에서 바나바의 서신이라는 이름 하에 히브리서를 인용하였다. 더구나 이것이 그 자신만의 의견인 듯이 표현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독자들이 이미 주지하고 있는 사실임을 암시하고 있다.

바나바가 히브리서를 썼다고 하는 견해는 후에 제롬에 의해서도 언급되었고, 4세기의 저작자들이었던 엘비라의 그레고리와 필라스터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코덱스 클레어몬타누스(Codex Claremontanus)라고 불리는 서방 사본에서 발견된 고대 정경 목록에서도 히브리서는 바나바의 서신이라는 부제로서 기록되어 있다.

바나바의 저작이라는 증거는 그리 충분하다고 할 수 없겠으나 그것들이 서방에서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히브리서에서 언급되는 유일한 지명이 이탈리아(히 13:24)이므로 바나바의 저작이 사실이라면 그 설이 이 지역으로부터 유포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 즉 바나바가 레위인이었다는 사실(행4:36)은 히브리서 저자가 관심있게 묘사하는 레위 제도와 깊은 연관을 지을 수 있고, 그가 바울과 깊은 연대를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바울적인 사상 문제 역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바나바 저작설에 신빙성을 더한다.

더구나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지에서 개종했던 디모데가 이미 바나바에게도 잘 알려졌을 것이므로 만약 히브리서를 쓸 당시에 바울이 이미 고인이었다면 디모데가 바울의 전 동역자였던 바나바를 만나려고 했던 것도 극히 자연스럽다.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불화(행 15:37-39)는 이미 화해되었고, 후에 바울은 바나바의 사촌 마가에 대하여 호의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참조, 골 4:10; 딤후 4:11).

물론 바나바의 저작설은 바울의 저작설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완전히 증명될 수 없다. 단지 여타의 다른 설들에 비해 가능성이 조금 더 큰 편이다.

아볼로 저작설
때때로 로마의 클레멘트, 누가, 실바누스, 전도자 빌립, 브리스길라와 아볼로 등도 히브리서의 저자로 주장되어 왔다. 이중 아볼로설은 몇몇 현대 학자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마틴 루터에서 유래하는 이 설은 비교적 그 증거가 취약하고, 바나바설의 경우에서와는 달리 초대교회의 전통적 지지를 전혀 받고 있지 못하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어디에 살았을까?

이 서신의 독자들이 어디에 살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 역시 명확하지 않다.

아볼로가 라이커스 계곡(골로새가 위치하고 있던 곳)의 교회들에, 혹은 고린도의 교회들에 편지를 썼다고 하는 견해는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독자들이 로마교회에 속한 유대 기독교인들이라는 견해 역시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달랴에서 온 자들’(히 13:24)이란 언급 이외에는 로마라는 특정한 지명을 암시해 주는 다른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반해 바나바 저작설은 구브로를 그 장소로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바나바가 원래 구브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설들은 그 어느 것도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이 서신의 목적지라는 설도 최근에 상당한 호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서신의 저자의 주요 논점이 쿰란 공동체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유대주의 분파적 형태에 직접적인 비판을 가함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특히 본 서신의 저자가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을 불신과 실패의 시대로 본다는 것은 광야 생활을 이상화 시켜왔던 쿰란 공동체와의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팔레스타인설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한 예로 그들이 처음에 주의 말씀을 들은 자들로부터 주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는 언급(히 2:3)은 그 독자들이 피선교 지역에 거주했다고 하는 추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 같다.

팔레스타인 지방, 특히 예루살렘에서는 많은 독자들이 이미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가난한 자들에게 관대히 베풀라는 언급(히 6:10)은 그 장소가 예루살렘이라는 가능성을 더욱 배제한다.

왜냐하면 그곳의 궁핍은 더 후기에 만연하였기 때문이다(참조, 행11:27-29; 갈 2:10). 또한 히브리서 12:4의 언급이 그 공동체에서는 아직 순교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면 팔레스타인설, 최소한 예루살렘설은 거의 결정적으로 배제된다.

만약 바나바가 이 서신의 저자라고 한다면 북아프리카의 고대 리비아 도시인 구레네(Cyrene)가 모든 구비 요건을 갖춘 장소로서 대두된다.

구레네는 BC 630년경에는 그리스 식민지였으나 로마 시대에는 괄목할 만한 영향력을 가진 유대 공동체가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 기독교가 정착한 것은 꽤 일찍이었다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가 구브로와 구레네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에 의해 전도되었다는 사실(행 11:20)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바나바가 구브로 출신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구브로와 구레네와의 연관 관계가 우리의 흥미를 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하였을 때 두 동역자였던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행 13:1)가 있었는데, 시므온의 다른 이름, 즉 니게르는 ‘검다’는 뜻으로서 그가 그의 동료 루기오처럼 북아프리카 출신임을 말하고 있다고도 추론할 수 있다.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졌던 구레네의 시몬(눅 23:6)과 동일인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 구레네 시몬에게는 복음서가 처음 출판되었던 로마 교회에 이미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알렉산더와 루포, 두 아들(막15:21)이 있었다. 그 어떤 경우에든 우리는 구레네의 기독교인들과 로마의 기독교인들과의 접촉을 상상할 수 있다.

이 상상은 히브리서 13:24에서의 이달리야에 대한 언급이 더욱 그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서신의 수신지에 관하여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이 서신을 썼든 또한 어디로 이것이 보내졌든 기독 교회가 수세대를 거치면서도 올바로, 그리고 그의 아들을 통하여 명확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메시지로서 그것을 전하여 내려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영상으로 보는 히브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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